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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행] 조선왕조의 법궁 경복궁

서울에는 조선의 궁궐이 5개가 있다.


왕이 살면서 정사를 돌조았던 법궁인 경복궁, 왕의 어머니 등 가족이 머물던 창경궁, 경복궁의 예비 궁궐이었단 창덕궁, 임진왜란 후 창덕궁에 왕이 머물 때 예비 궁궐로 지은 경희궁, 임진왜란 후 원산대군의 저택에 왕이 임시로 거처하면서 경운궁으로 불렸던 덕수궁까지.


경복궁의 뜻은 '하늘이 내린 큰 복'이다. 뒤로는 북악산을, 앞으로는 남산을 두고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한 조선 왕조 제일의, 임금이 사는 궁궐이다. 이후 확장과 중건을 거듭하다가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되었다. 그 후 경복궁은 270여 년간 복구되지 못하다가 1867년에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중건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 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이 정무를 보던 외전 과 관청들, 왕족과 궁인들의 생활을 위한 내전과 건물들, 휴식을 위한 정원 시설들을 조성했 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세운 건청궁 등 크고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들어 선 궁궐 복합체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권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때 계획적으로 훼손되었다. 1911년에 경 복궁 부지의 소유권은 조선총독부로 넘어갔으며,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주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조선물산공진회를 계기로 일제는 경복궁을 본격적으로 파괴했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 버렸다. 다 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했으며, 2010년에는 광화문이 원형복원되었다. 

경복궁 앞에는 관청들이 자리를 잡았었다. 지금 세종로 양쪽이 관청들이 있던 자리로, 지금도 정부청사가 세종로에 있으니, 600년이 넘은 관청 지역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것 같다.

경복궁의 시작은 광화문이라고 수 있다.

광화문은 일제시대 때 일본이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이전해 놓았었다. 후에 한국 전쟁 중 부서진 것을 1968년에 다시 옮기면서 남쪽이 아닌 남동쪽을 바라보도록 지었다. 그 당시 조선총독부 건물이 일본이 만든 남산의 조선신궁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비뚤어진 것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있던 시대의 광화문>


조선총독부 건물은 김영삼 정부때 폭파되어 해체되었고, 첨탑 일부가 독립문 공원 한쪽에 전시되어 있다. 

지금의 광화문은 2010년 재건하여 건물과 일직선이 되도록 다시 만들어졌다.



광화문으로 들어가 너른 마당을 지나면 흥례문이 나오고, 




흥례문 안으로 들어가면 경복궁 앞을 흐르는 개천과 개천으로 들어올지도 모르는 액운을 막는 서수가 자리해 있다


근정문을 지나면 경복궁의 대표 전각인 근정전(勤政殿)이 나온다. 근정전은 정치에 힘쓰는 궁이라는 곳이라는 뜻.
근정전에서는 공식적인 의식과 일부 행사등을 치루는 곳이었다. 

<근정문>

근정전과 그 앞마당. 신하들이 품계에 따라 도열했던 곳이다. 품계별로 서야할 곳을 표시한 품계석이 있다.

바닥의 돌을 '박석'이라고 부르는데, 비오는 날 배수를 원활히 하고, 미끄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울퉁불퉁하게 만들었다.


근정전 내부는 왕이 앉았던 옥좌가 있고 그 뒤로 보이는 그림은 '일월오봉병'으로 해와 달, 그리고 다섯개의 봉우리를 그린 그림이다. 조선의 왕은 언제나 이 그림 앞에 앉아있었다. 




근정전 뒤로 가면 사정전이 나온다.


사정전은 왕이 일상적인 업무를 보던 곳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주말 개념이 없었고, 쉬는 날은 명절이나 높은 신하가 죽었을때 몇일 정도였다고 하니, 왕이나 신하나 살기 힘들었던 시대였을것 같다.


사정전 앞에는 해시계인 '양부일구'도 있다.


양부일구는 작은것 한칸에 15분씩이다. 지금 가리키는 시간은 오후 5시. 실제 시간은 4시 반정도 인데, 이는 우리가 일본 동경의 시간에 맞추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아침에 힘들게 일어나 하루를 피곤하게 보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일본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해서다. 그런데 이제 고칠 때도 되지 않았나? 30분 늦게 일어나게 고치면 30분이 더 생겨서 좋을것 같은데.




임금의 생활공간이자 잠을 자는 강녕전이다. 강녕전은 다른 전각과 다르게 용마루가 없다.

용마루는 지붕 꼭대기에 기와를 겹쳐 한 줄로 쌓거나, 흰 빛이 나는 단단한 흙으로 마감한 것을 가리킨다.



강녕전에 용마루가 없는 이유는 용인 왕 위에 용을 또 둘 수 없어서라는 설이 있는데, 정확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강녕전 뒷건물은 왕비가 거처하던 교태전이다. 교태전은 '땅의 기운과 하늘의 기운이 화합한다'는 뜻으로 '주역'에 나오는 말이다. 


교태전 뒷편엔 경회루를 만들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계단식 정원으로, 장수와 부귀, 행복을 상징하는 봉화, 박쥐, 학, 모란, 국화, 매화, 채치, 불가사리 등을 새겨 넣었다. 




자경전 뒤에는 십장생을 넣은 굴뚝이 있다. 자경전 뒷담과 굴뚝을 결합해놓은 것으로 자경전의 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의 길을 모아 하나의 굴뚝으로 만든 것이다. 굴뚝 정면에는 해, 산, 물, 돌, 구름, 학, 소나무, 사슴, 거북, 불로초의 십장생 무늬를 넣었고, 그 위와 아래에 학과 나티 및 불가사리를 배치하여 불로장생 등 길상의 기능과 악귀를 막는 역할도 갖추도록 하였다.

경복궁 뒤쪽에는 연못과 향원정이 있다. 향원정의 뜻은 '향기는 멀수록 그윽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창경궁의 하이라이트인 경회루.


왕이 신하들을 불러 연회를 배풀던 경회루.


조선시대 최고의 법궁인 경복궁은 많은 건물들이 임진왜란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놀랍도록 훌륭한 건물들이 많이 있으며, 계속해서 예전 건물들을 복원하고 있다. 

철저한 고증과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완벽하게 복원되어 우리 역사의 위상을 다시 세울 수 있기를 바란다.


관람시간 : 9시 ~ 18시(입장은 5시까지). 동절기에는 17시까지(16시까지 입장)

관람요금 : 3,000원(5개의 궁궐과 종묘를 갈 수 있는 통합입장권은 10,000원)

휴관일 : 매주 화요일